항주 사투리

중국 사투리는 중국어의 분파입니다.중국은 지역이 넓고 방언이 많습니다.2000년 10월 31일 공포된 중화인민공화국 국가 공용어 문자법은 중국어 표준어를 국가 공용어로 확정했습니다. 한족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정도의 분화와 통일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어에서 점차 방언이 생겨났습니다.

항주어말으로 항주 시내와 일부 근교에서 쓰이는 지방 사투리를 가리키는 말로 항주 내 다른 지역 사투리와는 다릅니다. 항주어는 강남에 있으면서 상대적으로 북방 관화에 가깝기 때문에 강남 관화라고도 합니다.항주말은 오어태호편 항주영화로, 지리적 이유뿐만 아니라 언어 자체도 오어의 기본 특징이 있지만 송나라 통치 중심지인 남천으로 대표되는 몇 차례의 북방 이민으로 현지 언어 시스템이 크게 바뀌면서 강남지역에서는 특이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항주은 저장성에서 가장 큰 도시이고 항주어는 저장우어 중 가장 작은 방언 중 하나다.중국의 항주어를 모국어로 하는 인구는 120만~150만 명으로 보수적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항주에서는 동쪽으로 여항, 하사, 남쪽으로 전당강변, 서쪽으로 오운산, 전당에서 유류 부근, 북쪽으로 공천교에서 여항삼돈, 동북쪽으로 홈통교에서 여항교사 사이를 두루 거친다고 합니다.항주어는 원래 공용어였으나 당송 관화와 오월 방언의 결실로서 북송 이후 강남 관화의 대표주자로 자리잡았습니다.

항주 사투리의 역사적 연원

항주어는 전통적으로 외래 방언의 영향을 받아 여러 방언과 비교하여 많은 특징이 있습니다.
  • 동진 전의 항주말

    춘추시대, 오월 두 나라입니다.패권을 다투다, 항주가 먼저 월나라에 속하고, 그 다음은 오나라에 속하고,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에 다시 복속합니다.따라서 당시 항주 말은 옛 오어는 주나라 왕태백이 오나라를 옮겨갈 때 오나라 귀족이 했던 말과 아직 한족에 속하지 않은 월족 주민의 언어가 어우러져 생겨난 것입니다.항주어는 진·한·삼국·서진시기에는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동진 영가가 남도하기 시작하면서 항주어의 첫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 동진 영가남도-제1차 언어융합

    오나라 말은 영가의 난 이전에 이미 독립적인 방언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습니다.영가의 란과 진나라 왕실이 남으로 천도하면서 항주는 중원어를 쓰는 북방사람들을 많이 맞이하게 되였습니다.북쪽에서 온 이주민들은 인구 · 정치 · 경제 등 방면에서 우세한 위치에 놓여 당시의 항주 말을 크게 개조했습니다.

  • 남조-북송 시대의 항주말

    이 시기 항주는 비교적 평온하게 발전하였는데이 시기 항주말의 변화를 언급한 문헌은 거의 없습니다.

  • 남송 건염 남도-제2차 언어융합

    남송이 림안으로 천도하면서 항주말에는 매우 큰 변화가 생겼다.외지인 중에서 변경 (지금의 개봉)이 가장 많았습니다.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건염 원년 (1127년)부터 소흥 26년 (1156년) 까지의 30년 동안 항주 에 들어온 북방 주민은 이미 현지 인구를 초과하였습니다.건도에서 함순에 이르는 100년 (1165년-1274년) 동안, 린안푸치소 첸탕과 런허 두 현의 인구는 3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이로부터 알수 있는바 남송시기 림안성의 주민은 절대다수가 북방에서 온 이민이였습니다.인구가 많은 데다 정치 · 문화적 요소도 작용했기 때문에, 남쪽의 도하 사민들도 볜량을 위주로 한 당시 송나라의 북방'관화'를 남방 방언에 영향을 주였습니다.항주말은 어음, 어휘, 어법 면에서 매우 큰 변화를 가져왔고 송나라 때의 북방어의 색채를 농후하게 물들였습니다.

  • 원나라-명나라 말기의 항주 말

    원나라때부터 시작된 항주말은 점차 주변 방언의 영향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명나라 말기에 이르러 항주는 또 주변의 방언들과 융합되면서 변하여 오늘날의 북부 오어를 형성하게 되였습니다.항주 방언도 주변 방언으로 유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 청대의 기인은 남쪽에 주둔——제3차 언어 융합

    항주말은 기타 오어 방언에 비해 문어가 더 많은데 이는 청나라 초기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민간에서는 오래동안 오늘의 항주말이 주변 방언과 다른 원인은 단지 남송시기의 영향이라고 오인해왔습니다.이것은 사실 견강부회한 논법입니다.송대의 관화와 오늘날의 북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항주어는 기타 오어인 타이후방언에 비해 더욱 많은 공용어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근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청조때 항주는 절강의 행정수부 및 복건절총독부 소재지로서 다른 지방보다 북경 관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 청나라-중화민국의 항주말

    청나라 중후기 항주어에 비교적 많은 영향을 준 것은 샤오싱 방언 (소산 방언 포함)을 대표로 하는 우 방언이었습니다. 학계에서 항주 방언을"우 방언의 외양을 가진 남방 공용어"라고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항주 속담에도'항주 무는 사오싱 땅에 심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항주 사람 중 상당수가 본적이 사오싱 지역이라는 뜻이다.장기간의 인구류동과 경제교류로 말미암아 항주방언은 주변 오방언지역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 항주말의 현상

    하지만 2000년대 들어 항주 말은 크게 달라지고 있습니다.항주 구시가지의 항주 사람들이 교외로 이주하고, 교외의 젊은이들이 항주어를 즐겨 배우기 때문에 항주어 통행이 확대되고 있습니다.한편 표준어의 영향과 항주 외지의 인구 증가로 인해 통용되는 항주어는 표준어에 가까워지고 있으며, 특히 어습관과 생소한 글자의 발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항주 방언의 예술 표현 형식

소열혼

소열혼

속칭 '배고당 팝니다'라고도 불리며 '꽹과리책'이라고도 합니다.항가호, 진화, 닝보 등이 주로 유행합니다.청나라 말 항주 거리의 설조보에서 유래한 것으로, 1905년 두보림은 이 같은 랩 조보를 배고당을 파는 데 활용해 기존의 랩뉴스와 생활 일화를 간단한 줄거리와 인물 성격, 갈등이 있는 프로그램으로 발전시켜 '소열혼'을 예명으로 공연했습니다.항주 소열혼은 항주 사투리로 랩을 하고, 반주악기는 징이나 삼교판 위주로 위트 있고 익살스러우며 일정한 공연장이 없습니다.

항주극

항주극

일명 무림반으로 불리는 항주시의 지방 희곡극은 항주에서 시작되어 저장성 항주, 닝보, 장쑤성 이싱, 창저우, 우시, 진장항극은 항주 관화를 기본으로 중주운념으로 노래하고, 곡조는 [경조], [대륙판], [평판]을 기본으로 하여 구성지고 질박하며, 거칠고 우렁차다.2009년 항주 슬랩스틱예술극장과 항주 황룡월 극단을 기반으로 항주 항극단과 황룡항 극단의 창단이 재개됐습니다.'신룡봉쇄' '영원한 뇌봉' 등 신작들이 성·시 대상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항주 평화

항주 평화

'항주 대서(大書)'라고도 불리는 항주(杭州)는 저장(浙江)성 항주(杭州)와 주변 지역에서 유행하는 곡예 품종입니다.항주 평화는 남송시대 고대의 곡예에서 유래한 것으로, 명말 청초에 형성되어 청대에 이르러 도광, 함풍년에 이르러 더욱 성숙해졌습니다.항주 평화는 한 사람이 항주 사투리로 표현하는데, 서사 중에는 모의 광고 내용을 삽입해 중간중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2008년 6월 저장성 항주시에 등재된 항주평화는 국무원의 승인을 거쳐 국가급 무형유산 2차 등재를 승인받았습니다.

항주의 노점용 대들보

항주의 노점용 대들보

일명 '안강'이라 불리는 항주 노점은 청나라 건륭제 연간에 생겨났고 항주와 위항등지에서 유행했습니다.항주 사투리를 바탕으로 한 중주운창독은 곤곡 레퍼토리를 근거로 5~7인 1조로 각색을 나눠 악기를 연주하고 좌창하거나 밴드를 거느리며 노래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앞좌판'과 '뒷좌판'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항주 노점은 앞좌판 위주입니다.2008년 6월 '항주 노점기' 1차 국가무형문화재확장사업 곡예종목록 등재를 성공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