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저문화소가 위치했던 첸탕강 유역은 중국 벼농사의 가장 초기 발원지 중 하나였으며, 벼재배는 당시 가장 주요한 농업생산 활동으로 선정돈, 쉬자완, 첸산헝, 논밭과 우현징후 등의 유적에서 모두 벼와 쌀이 발견되어 인공 재배에 해당하는 멥쌀과 멥벼가 판명되었다.
각 씨족 부족은 벼 외에도 야채, 과일 및 일부 유류작물 재배에 종사하고 있다.전산양유적지에서는 호리병박, 땅콩, 깨, 누에콩, 단과자, 마름, 모도핵, 대추핵 등의 유물이 출토됐으며 일부는 야생식물의 열매이고 일부는 인공 재배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저문화의 농업생산수준의 중요한 표시는 새로운 경작방법과 생산기술의 발명과 보급이다.쟁기는 양저문화농업경작의 주요 방식으로서 많은 유적에서 당시 사용되었던 돌 쟁기가 발견되었는데, 전산 양산유적에서 출토된 돌 쟁기만 100여점이 발견되었다.돌 쟁기는 두 가지 형상으로 만들어졌는데, 평면이 삼각형으로 되어 있고, 칼날이 양 허리에, 중간에 구멍이 뚫리거나 구멍이 뚫려 있어 종종 수직으로 배열되어 있어서, 목제 쟁기판에 설치하여 논을 갈아엎는 데 쓸 수 있다.다른 것들도 삼각형에 가깝고, 날이 아래쪽에 있고, 뒷부분에 휜 손잡이가 있는데, 아마도 도랑을 파는 도구일 것이다.이 두 종류의 돌 쟁기는 양저대 사람들이 발명한 새로운 농기구로, 농업 생산의 신속한 발전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양저대 문화 시기의 농업이 이미 사래 경작 농업에서 쟁기 농업 단계로 발전했음을 나타내며, 이는 고대 농업 발전의 일대 진보이며, 중대한 변혁으로 이후의 농업 발전을 위한 유력한 기초를 마련했음을 나타낸다.
양저문화의 대량 석기 중에는 날개를 접은 뒤 활을 날리고 등 중앙에 장부가 튀어나와 둥그런 구멍을 뚫어놓아 나중에 이 지역에서 사용된 철제 김매기와 흡사하게 만들어 고대 최초로 논에서 풀을 뜯는 농기구로 알려져 있다.중경 제초 기술의 출현은 쟁기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쟁기질 조작은 선진적인 조파 기술에 조건을 만들어 주었고, 또한 중경 제초에도 편의를 제공했기 때문이다.또 전산양유적에서는 삼태기와 같은 모양의 손잡이 목기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형제는 이 지역 농민들이 현대에 사용하던 나무 천부레와 같이 강바닥 흙을 가져와 비료를 주는 도구이기도 했다.중경제초와 비료의 결합은 분명 농작물의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킬 것이다.
벼농사는 물을 끌어 밭에 관개해야 한다.우물을 파고 도랑을 건설하고 농지를 관개한 것은 양저 문화가 농업을 발전시킨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과이다.오현 징호, 곤산 태사전, 우시난방샘, 강음하항, 가선신항 등에서 이 시기의 우물이 발견됐다.징호는 100여개의 우물을 발견하였고, 태사전의 우물은 목정바퀴를 설치하였으며, 가선신항우물의 우물은 목축을 하였다.
이때 우물, 우물 벽을 쌓는 기술은 분명히 하므도 문화, 마가하마 문화의 특징을 이어받아 향상되었다.더 중요한 것은 우물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는 점. 그 역할은 단순히 일상생활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서가만 유적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 유적이 발견돼 양저문화에 관개농업이 등장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농업생산기술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개발됐다.양저선민은 하모도 문화 이래 3000년 동안 벼 재배와 논밭 관리에 대한 경험을 쌓고 농업 생산에서의 관개 기술을 점차 모색하여 발명하였으며, 이로 인해 가뭄과 물 배출에 대한 저항력을 크게 강화하였으며, 벼농사를 더욱 안정된 토대 위에 두었으며, 남쪽의 광범위한 지역의 농업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